신조어의 세계

분명 우리말인데…외국어보다 높은 ‘언어 장벽’

김지윤 기자

‘신조어’ 나를 소개합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아빠, 자꾸 그러면 사람들이 ‘고나리자(관리자의 오타에서 나온 신조어, 지나치게 잔소리하는 사람)’라고 욕해.”

대기업 홍보팀에 근무하는 고건혁씨(45)는 최근 중학생 딸과의 대화에서 ‘언어 장벽’을 느꼈다. 스마트폰 메신저에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마저 없었다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심 신조어에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를 알았다 싶으면 또 하나가 등장하니, 원(웃음).”

프리랜서 작가인 이유진씨(38)는 늦둥이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학부모 ‘단톡방(단체카톡방)’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다. 영어와 중국어를 전공했고, 대학원까지 졸업한 그녀에게 엄마들의 ‘일상 언어’는 학술지에 등장하는 ‘전문용어’보다 낯설다. “ ‘갓띵작(신이 만든 명작)’ ‘#G(샵지, 시아버지)’ 같은 단어들은 대체 누가 만드는지 궁금해요. 처음엔 거부감이 들어서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표준어를 사용하는 제가 더 이상한 사람이 되더라고요.”

통상적으로 신조어(신어)는 ‘새로 생겨난 개념 및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설명조차 ‘구문(舊文)’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문자가 대화를 대신하고 그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개념과 사물 지칭의 목적을 능가하는 예측 불가 형태의 의미를 지닌 신조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은 매년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네이버 등 포털에 등록된 온·오프라인 언론 매체에서 사용된 단어들을 토대로 신조어를 수집한다. 이렇게 ‘선택된’ 단어들은 평균 300~500개 정도다. 기사에 언급되지 않은 신조어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빈도상으로는 기존의 단어들을 혼성한 합성어와 파생어가 가장 많고 접미사나 접두사를 붙인 신조어가 그 뒤를 잇는다. 단일어에서 출발한 신조어는 전체 비율의 10%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신조어는 누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만드는 것일까.

[누가] 과거엔 권력층이 생성…지금은 ‘몰라’

과거에는 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생성한 신조어가 많았다. 정부가 새로 도입한 정책이나 제도 등에 따라 파생되는 단어들이 이에 해당됐다. 그러나 최근 만들어지는 신조어의 대다수는 생성 주체는 물론 개수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국립국어원의 위진 연구원은 “신조어를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답은 ‘아무도 모른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많이 사용하는 20~30대 성인이 신조어를 만드는 주요 계층일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오히려 신조어를 가장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진 10대들의 언어는 자기들끼리만 사용하는 ‘은어’라 금세 소멸되는 경향이 많다.

[어떻게] 두 단어 합쳐 ‘포세권’·표기 유사해 ‘박ㄹ혜’…법칙? 없어요

조어의 법칙 역시 일정한 유형이 없어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다. 다만 최근에는 개인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신조어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소름’을 ‘소오오오름’이라고 표현하거나 ‘핵~’ ‘개~’ ‘칼~’ ‘극~’ 등과 같은 접사를 활용해 보다 거칠고 신속하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족’이나 ‘○○남’ ‘○○녀’같이 동일한 특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성별에 따라 묶는 접사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권’ ‘○○계’ 등 한 범주 안에 드는 공통의 주제나 지역, 사람을 무리 짓는 명명 역시 눈에 띈다. 포세권(포켓스탑+역세권의 줄임말), 찍먹계(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사람들)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문법을 파괴하는 신조어가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못된 손’ ‘착한 가격’ 등은 호응되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모순된 단어의 결합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 한몫하는 것이다. 신조어를 엉뚱한 일탈의 언어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단순 타이핑 실수나 ‘박ㄹ혜(박근혜) 대통령’처럼 발음·표기가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도 존재한다.

[어디서] 뭐든 줄이는 SNS서 출발…방송 확산

‘빼박캔트(빼도 박도 못한다(can’t))’ ‘세젤예(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안궁안물(안 궁금하고 안 물어봤다)’ 등 소위 ‘줄임말’ 신조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SNS다. 제한된 글자 숫자 내에 언어를 효율적으로 압축해 사용하기 위해서다. ‘ㅈㄱㄴ(제곧내, ‘제목이 곧 내용’의 줄임말)’이나 ‘ㄱㄷ(‘기다려’의 줄임말)’ 등 마치 암호와 같은 자음 압축형 단어들은 ‘줄임말’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신조어 유형이다.

자신의 게시물이 잘 노출될 수 있도록 핵심 검색어를 달아주는 해시태그(#) 역시 기발한 신조어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다. ‘인생짤(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잘 나온 사진 혹은 영상)’ ‘먹스타그램’ 등이 바로 그 예로, 주로 강조하고 싶은 단어나 표현을 담는 경향이 있다. ‘랜선 이모(웹상에서 만난 이모뻘의 여성)’ 등 온라인 속 인간관계를 지칭하는 표현이 늘어난 것 또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SNS 덕분에 신조어는 신문이나 TV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빠르게 대중의 언어로 고착될 수 있었다. 이제는 거꾸로 SNS에서 신조어가 먼저 확산되고 나면 TV 예능 프로그램이 이러한 트렌드를 뒤늦게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왜] ‘직장살이’ 부조리 풍자…‘한남’ 혐오 표출

신조어의 생성은 사회·문화적 배경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풍자하기 위한 신조어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직장살이(시집살이처럼 직장 내 동료들의 등쌀에 시달리는 생활)’ ‘쉼포족(휴식을 포기할 만큼 바쁘고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 등은 먹고살기 팍팍한 ‘헬조선(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지옥에 비유)’ 직장인들이 겪고 있는 비애를 담았다.

‘부장인턴(정규직 채용에 거듭 실패하고 인턴만 전전하는 취업준비생)’ ‘사망년(온갖 스펙을 쌓느라 고통 받아 사망할 것 같은 대학 3학년)’ 등은 취업난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신조어다. 남길임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2년간 사용된 신조어를 긍정, 중립, 부정의 세 범주로 나눠 분류한 결과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았다”고 분석했다.

계급 갈등을 드러낸 ‘수저론’이나 남녀의 대립을 보여주는 ‘한남’ ‘메갈녀’ 등은 사회적 갈등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치녀’나 ‘틀딱충(틀니가 딱딱거린다는 의미에 벌레 충자를 불인 신조어, 노인을 조롱할 때 쓴다)’ 등은 ‘혐오’라는 감정을 내세워 특정 연령대나 성별을 비난하고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얼마나] 짧고 굵은 신조어…10년 생존율 25%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는 시대지만, 이 중 오래 살아남는 신조어는 그리 많지 않다. 국립국어원이 2005~2006년 수집된 938개의 신조어를 추적조사한 결과 10년 후인 2016년에도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231개에 불과했다. ‘낚시글’ ‘공시족’처럼 보통 사회현상과 관련된 신조어는 생명력이 긴 편이다. 선거 등 정치적 이슈나 월드컵, 올림픽 등 스포츠와 관련된 단어들은 주기에 따른 파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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